가마니는 일본말이에요. 우리말로는 `섬`이죠-CBS, 07.11.16.

2007.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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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니는 일본말이에요. 우리말로는 '섬'이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들풀이 되어라,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

[ 2007-11-16 18:06:25 ]


높은 누마루에서 내려와 맨발로 발레리나처럼 세운 발끝을 땅에 깊이 꽂고 들풀이 되어라.

누구보다도 스스로 들풀이 되고자 했고, 지금은 들풀, 짚풀을 사랑하는 사람, 인병선 씨. 그녀는 ‘껍데기는 가라’ ‘금강’으로 잘 알려진 고 신동엽 시인의 아내죠.

시인과 사별한 뒤, 한 농가에서 짚공예 장인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우리 짚과 풀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됐고, 세계에서 하나뿐인 볏짚 전문 박물관 ‘짚풀생활사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의 길’ 대신에 우리의 짚과 풀 문화 연구에 많은 시간들을 바친 인병선 관장을 11월 1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남편인 ‘신동엽’ 시인의 유품을 모아 유품 전시회 열어

▶ ‘들풀이 되어라’ 라는 시를 쓰신 건 언제죠?

시집은 낸 지 거의 30년 가깝죠. 25년 정도 되었네요. 제가 쓴 책은 시집과 산문집 등 문학 쪽이 있고요. 또 짚풀문화와 관련된 민속학 책이 있고요. 이렇게 두 개가 대별이 되는데요. <들풀이 되어라>는 시집이고, <벼랑끝의 하늘>은 산문집이고요. 그 책은 제가 50대 때까지 쭉 문학을 하면서 써왔던 것을 총 결산하는 뜻으로 시집과 산문집을 내면서 문학에서는 손을 뗐죠. 그러나 민족문학작가회에서는 제가 아직도 시인으로 되어 있어요.(웃음) 그 후로는 짚풀문화에만 매진을 한 거죠.

▶ ‘껍데기는 가라’라는 유명한 시를 쓰신 신동엽 시인이 남편분이신데요. 지난달부터 이번 달 4일까지 ‘신동엽 시인 유품전’을 여셨죠?

저희 박물관은 그동안 기획전시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리를 하면서 그것을 새로 확보를 했어요. 그래서 첫 전시로 ‘신동엽 유품전’을 했는데, 부여에 있는 신동엽 생가를 부여군에 기증하면서 지금 부여군이 주도해서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문학관 건립이 완성이 되면 저희가 유품을 넘겨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서울에서 아무래도 가깝게 지내던 친지들도 많이 계시니까 한 번 저희 유가족 나름대로의 기획으로 전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 어떤 것들이 전시되었었나요?

그 분이 쓰신 육필 원고, 입었던 옷, 몸에 지녔던 신분증, 파이프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여러 번 이사를 다녔지만, 다들 와서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했냐고 하지만, 버릴 권리가 저한테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육필원고 같은 경우도 처음에 쓴 것, 교정 본 것, 완전히 정리해서 발표한 것을 쭉 봤을 때 그 변화나 언어 선택 등이 그 양반의 시 정신이나 사유의 과정 같은 것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자들한테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심지어 종이 한쪽에 끄적거린 메모나 낙서까지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10대 때 물건도 그대로 남겼고요. 이런 것들이 모이다 보니까 한 4-5천점 정도 되요. 상당히 방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고해상으로 스캔을 받아서 저희가 일단 스캔한 영상자료를 부여군에 넘겨주었고, 유품은 아직까지는 저희가 가지고 있는 거죠. 문학관이 다 지어지면 그 때 유품을 부여군으로 보내야죠.

▶ 편지를 보면 신동엽 시인은 ‘석림’, 인병선 선생님은 ‘추경’이라고 부르셨는데, 서로 ‘호’를 주고받으신 건가요?

그 때만 해도 약간 구세대 아닙니까? 근데 저는 건방지게도 중학교 때 호를 만들어서 불렀어요. 그냥 감상적인 생각으로 만들었는데요. 그 때 국어 선생님이 박목월 선생님이셨거든요. 그 분한테 보여 드렸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웃기만 하시더라고요. 어린아이가 그런 것을 하니까 그랬나봐요. 나중에 신 시인을 만나면서 “나는 ‘추경’이라고 합니다.” 라고 했더니, 자기는 ‘석림(石林)’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름을 애칭처럼 주고 받은 거죠.

▶ 처음 만나신 것은 언제셨어요?

고 3말에 제가 대학 들어갈 준비 다 끝냈을 때 쯤이었는데요. 제가 살던 돈암동 근처에 신 시인의 고향 선배가 헌책방을 하고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철학을 한답시고 철학관련 책을 찾으러 가끔 그 책방에 들렸고, 그런 저를 신 시인이 유심히 봤나봐요. 저는 사람을 잘 안보거든요. 그런데 저를 유심히 봤다가 어떻게 말을 걸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죠.

▶ 뭐라고 말을 거셨어요?

제가 찾는 책이 없어서 “그 책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뒤에서 “그 책은 없지만, 이 책은 어떨까요?” 하면서 책을 빼드는데, 자연스럽게 돌아서서 그 책을 쳐다볼 수 밖에 없잖아요. 그 때 눈이 마주쳤는데 그렇게 빛나는 눈은 처음 봤어요. 아주 크고 빛났던 그 눈에 제 운명이 바뀌게 되었죠.

▶ 1935년에 평남 용강에서 태어나시고,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다니셨으면 개성이랄까 대단하셨을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우연히 철학에 관심이 있었고요. 그래서 고 1때 신학대학 야간학부를 청강하면서 기독교 역사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 신동엽 선생님이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셨다는 기록도 있던데요.

본래 디스토마를 앓으셨고요. 결혼 하자마자 디스토마가 발병되었는데요. ‘디스토마’라는 것은 잠복기가 있는데, 청년기를 6.25 때 보냈기 때문에 아주 고생을 하면서 디스토마 감염이 되었나봐요. 그런데 결혼 하면서 그것이 발병되었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시부모님이 한약을 많이 보내주셨는데 그러다 보니 위가 약해지고 후유증이 생겨서 결국 40세에 간암으로 돌아가셨죠. 그런데 그 동안에도 계속 소화가 안 되고 해서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 유품전을 ‘이별식’이라고 하신 것이 좀 특이하게 느껴져요.

그 취지는 이제는 가족의 사람이라는 차원은 이제 벗어나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껏 끌어 안고 있던 유품을 떠나보냄으로써 이제 민족의 사람, 민족의 시인이라는 생각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 30년 전부터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우리 짚풀문화에 관심 갖게 돼

▶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도 다녀오셨는데요. 어떤 일로 다녀오신 건가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는 고려인들이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분들이 대개 함경북도 쪽에서 구한말 내지 20세기 초에 연해주로 이주했죠. 함경북도 쪽이 굉장히 척박한데다가 땅도 없고 화전민들이 많았는데, 연해주가 광활한 땅이다 보니 그리로 가게 된 거예요.

가서 논을 개간해서 자리를 어느 정도 잡았는데, 1937년에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켜버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 나와.” 하면서 데려갔기 때문에, 40일간 이주하는 동안 굶어죽기도 하고 얼어 죽기도 하는 등 굉장히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죽으면 그냥 들판에 내버리고 간 거예요. 이주를 가서 처음에는 아주 원시적인 움집을 짓고 시작했다고 해요. 우리 민족은 정말 어디에 갔다놔도 생존력은 대단하다고 느끼는데요. 제가 이번에 간 것은 그 분들이 아직도 민요 같은 우리 노래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을 ‘한야코프’라고 하는 고려인 4세인 작곡가 분과 ‘김병학’이라는 시인, 이 두 분이 채록을 해서 우리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책을 냈어요.

그래서 출판 기념회 겸해서 민족문학작가회에서 17명 정도가 갔습니다. 출판 기념회도 하고 책도 전달하는 행사가 있었는데요. 근데 7박8일이나 하기 때문에 저는 사실 욕심이 고려인들이 끝까지 3세, 4세까지 내려가면서 이제는 상당히 우리말을 안 쓰는 세대가 생겼는데,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뭔가, 소위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것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우리 사회도 다민족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농촌에서 심지어 50%까지 국제결혼을 하고 거기서 태어나는 자식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될 때는 정체성 문제가 상당히 사회문제화 될 가능성이 있고, 이제는 단일민족, 민족주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가 왔다 했을 때 그 조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일정 중 하루를 다 산으로 가는데, 저는 혼자서 고려인 마을로 갔습니다.

거기에 노인들은 우리말 하시는 분들이 아직 계시더라고요. 만나서 된장 담아놓은 것도 봤고, 대문 들어가니까 시래기를 널어놨고, 텃밭도 있고요. 뒷간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고, 닭장도 우리 농촌에서 본 것과 똑같고요. 생활하는 것이 옛날 그대로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다 사진을 찍고 사물의 명칭을 서로 맞춰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곡식을 까부는 ‘키’를 거기서는 ‘칭’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니까 너무 좋아하시고 마치 친정집에 간 것처럼 모두 반가워하고 손 붙잡고 얘기하고, 음식에 대해서도 얘기 했어요. 그리고 정체성 문제에 대해 나중에 고려인 지식인들과 얘기를 했는데요.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분들은 언어도 중요하지만 음식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다 초월해서 뭔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주 유아 때 이민을 가거나 입양을 간 아이들이 기어코 자기 부모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뭐란 말인가 하는 거죠. 음식도 잃어버리고 말도 잃어버리고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뭔가 하는 거죠.

저는 그것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것이 있다고 보거든요. 저는 그것이 일종의 정신적인 DNA라고 할까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가셔서 그냥 관광만 하신 것은 아닌가보네요.

저는 짚풀문화 조사할 때도 관광은 잘 안해요. 민속문화를 조사하고 짚풀문화를 조사하죠. 그런데 가니까 빗자루를 만드는 ‘대싸리’라는 것도 다 있더라고요. 아주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 짚풀에 대한 사랑과 연구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제가 문학에 뜻을 두었었는데요. 혼자 된지는 벌써 38년 되었는데,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가면서 답사팀을 따라서 답사를 많이 다녔어요. ‘국립중앙박물관 민악회’라는 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요. 한 달에 한 번씩 답사를 나가는 것이 저로서는 좀 숨통이 트이고 좋았습니다. 카메라도 배워서 따라 다니다가 신동엽 시인을 만났던 것처럼 어느 날 필(feel)이 온 거죠.

그런데 답사는 대부분 고택, 사찰을 위주로 가는데요. 저는 그런 지배권 문화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껴요. 지배자의 문화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확실히 계급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고건축하는 분들이 그런 곳에 가면 어깨에 힘주면서 설명을 하거든요. ‘팔작지붕’에 대해서 수십 번 들었는데 제가 관심이 없는 부분은 기억을 잘 안해서 그런지 지금도 팔작지붕이 뭔지 잘 몰라요.

그래서 절에 가면 저 혼자 절 밑 동네로 갔어요. 그러다 우연히 짚풀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사진을 찍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아닐까? 농민의 예술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짚’과 ‘풀’이 서로 다른 건가요?

‘짚’이라고 하면 볏짚, 밀짚, 보릿짚 이런 것들이고요. ‘풀’이라고 하면 산과 들에 나는 갈대, 억새들을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뭔가를 다 만들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집도 지었고, 깔개도 만들었고, 신발, 우장, 농사지어서 널어두는 것, 담아두는 것 다 짚이나 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30년 전쯤에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급속도로 사라졌어요. 마치 썰물에 쓸려 나가듯이 정책적으로 많이 사라졌죠. 농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가고 정보화 시대로 가는 것은 세계 어디나 다 같은 문명의 흐름입니다. 그러나 우리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너무 강압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강행했다는 점에서 조사해서 남겨야 할 것들을 가차없이 다 버렸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가차없이 버리는 과정에서 짚풀문화를 발견했고 그것이 썰물처럼 쓸려 나가는 현장에서 누군가 이것을 붙잡아야 되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거예요. 그래서 풀의 경우에는 아까 말씀드린 카자흐스탄에 유배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움집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무엇을 깔고 무엇을 덮었을까요?

당연히 풀이죠. 풀도 뻣뻣한 것은 안 되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풀을 찾아서 깔고 덮고 한 거죠. 그러니까 풀문화는 이 땅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이 땅에 나는 식물을 활용한 역사거든요. 그리고 볏짚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3-4천 년 전에 들어왔다고 하니까 그 때부터 볏짚을 활용했다고 봤을 때, 거기에는 수천 년, 수만 년 우리 조상들이 짚과 풀을 활용한 삶의 역사인 동시에 삶의 지혜와 또 그 속에 엄청난 과학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아무 조사나 정리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문화재의 손실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혼자서 농촌에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나와서 조사를 하고, 증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사진도 찍고, 수집도 했죠. 이렇게 하다보니까 15년쯤 전에 ‘이것은 후손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가르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박물관을 세우게 된 거죠.

그런데 학문적으로는 옛날에 이렇게 살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연구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는데요.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럼 현대에는 이 짚풀문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현대에 어떻게 재활용하고 재창조해서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역시 대중과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과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는 목적으로 박물관을 세우게 된 거죠.

▶ 사실 짚이나 풀이 늘 있었던 것이고, 근대화 되는 과정에서 마치 우리가 못 살던 시절의 흔적들 같이 천덕꾸러기 취급도 받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주산업이 농업이었고, 주산업을 담당하던 농민들이 창조하고 지켜온 문화라는 점에서는 어느 것보다 일종의 생산문화라고 봐요. 농사짓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 썼고, 또 그분들이 대개는 땅이 없어서 절반은 지주에게 주고 남은 것으로 생계를 잇고, 해마다 많은 식구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다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속에서 나머지 볏짚을 가지고 그 농사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그 문화에 대한 의미라든지 하는 것들이 전혀 다른 것과는 좀 다르게 해석이 되거든요.

눈물겨우면서도 사실 입을 것, 먹을 것, 생산해 주는 것을 특권층은 편히 앉아서 그걸 누리면서 살았다는 것은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별로 가치부여를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심정이 좀 있어요. 물론 그것도 그 가치대로 인정을 해야 하기는 하지만, 사실 농민들부터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제가 다닐 때도 그까짓 것을 왜 사진을 찍느냐고 했어요.

그 때만해도 카메라가 지금처럼 보급이 안 되어 있을 때라서 제가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 “그걸 왜 찍나? 차라리 나를 찍어라.” 라는 농담도 했는데요. 처음부터 “그까짓 것”이예요. 그런데 그 분들이 자기네가 창조했고 자기네가 지켜온 문화에 대해서 전혀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그 분들의 책임도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도 있죠.

▶ 짚풀, 특히 볏짚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설립한 박물관은 전 세계 통틀어서 이 곳 한 군데 뿐이라고 하던데요. 물론 짚과 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민속자료나 연장류도 많고요. 나중에 품목을 더 확대하신건가요?

제가 콜렉션을 시작하다보니까 일종의 중독 증세가 생겨서요. 제가 일본에 1996년 1년 동안 오사카 민족학 박물관에 연구원으로 가있었어요. 그 직전까지는 계속 콜렉션을 하다보니까 소위 짚풀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일본에 딱 도착하니까 ‘내가 중독증세에 걸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와서는 안했죠.

▶ 하긴 그런 중독증세가 없으면 이런 수집이 되겠어요?

그럼요. 사립박물관 관장들은 다 일종의 중독자들입니다. 아름다운 중독자죠.(웃음)

▶ 그런데 ‘가마니’가 우리 것이 아닙니까?

가마니는 일본 것이예요. 일본말로는 ‘가마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가마니’가 된 거죠. 우리말로는 ‘섬’이라고 부르죠. 19세기 말에 이미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와있었거든요. 인천이나 왜관, 부산에는 일본 상인들이 와있었는데, 한국은 쌀이 싸고 일본은 비싸니까 쌀장사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벼로 유통하지 않고 쌀로 유통하는데 우리 섬에다가 담아서 보내니까 다 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네 나라에서 가마니를 들여다가 거기다 담아서 보내는데, 가마니를 수입해야 하니까 단가가 많이 들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농민한테 ‘가마니 치기’를 가르쳤어요.

처음에 통계를 보면 일본에서 가마니틀까지도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우리 농민들은 지푸라기를 엮는데 돈 받고 하는 것은 천민들이 하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안하려고 하는 것을 조선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 교회를 쫓아가서 고깃국에 쌀밥을 해주고서 먹여가면서 이것을 가르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는 우리 민족에게 굉장한 질곡이 돼버렸죠.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이것이 군수품으로 활용되면서 강제로 공출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 당시에 초등학교에서도 초등학생들이 가마니 치기를 배우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해방 후에도 가마니는 많이 쓰다가 1970년대쯤에 포대가 나오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죠.

▶ 이렇게 짚과 풀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더 설명해 주시죠.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 짚신의 경우, 부여 궁남지라고 무왕의 전설과 관련된 큰 연못이 있는데 거기 청소를 하다가 그 안에서 백제 시대 짚신 63짝이 나왔어요. 천오백년 전 짚신이 나왔다고 하면 아무도 못 믿는데요. 그것이 뻘흙속에서 산소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남아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발견된 즉시 뻘흙과 함께 떠서 보존처리해서 지금도 있습니다.

그것을 정밀촬영을 해서 보니까 온전한 것은 거의 없고 파편처럼 부분 부분 남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전부 조합해서 어떤 형태였는가 제가 조사를 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짚신 형태가 일본의 ‘와라지’와 너무 흡사해요. 와라지는 일본 짚신인데, ‘게다’라고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러니까 백제 짚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죠. 충북대학에서 조사를 했는데 재료가 ‘부들’이었어요. 부들이라는 것은 가운데 쏘시지 모양의 것이 나오는 키 큰 늪에 나는 풀이거든요. 그것이 지금도 궁남지에 가면 엄청난 부들밭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여에 가면 “이 부들밭은 절대로 없애지 말라”라는 얘기를 하는데요. 이것이 백제 때부터 내려온 부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농업 경제학자 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짚풀문화에 더 큰 애정을 느껴

▶ 어릴 때는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저는 머리가 별로 안 좋아서 학교에서도 더러 1등도 하긴 했지만 주로 2등을 많이 했고요.(웃음) 또 학교 졸업하니까 그 지긋지긋한 시험을 안 보는 것이 너무 좋았고요. 뭐 평범한 소녀였어요.

▶ 부모님과 고향에 대해 얘기해 주신다면요.

저는 고향이 평안남도 용강이예요. 진남포에서 좀 더 들어가서 있는 곳인데 그 곳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까지 살았고, 주로는 평양에 살았어요. 그러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월남을 했죠. 저희 아버님은 농업 경제학자였어요. 그래서 농업 경제학자로서의 아버님의 유전자 같은 것이 이 짚풀문화 연구를 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져요.

그 전에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닐 때 해가 어둑어둑하게 넘어가면 외딴 마을에서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갈 수도 없고, 이장 집으로 가면 재워주곤 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마음이 막 쓸쓸해지고 내가 왜 거지처럼 이렇게 헤매고 다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저희 아버님도 그 전에 농촌 실태 조사를 엄청 하셨거든요. 그 기록이 지금도 남아있고요.

그래서 그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민족시인 내지 민중시인으로서의 정신적인 영향도 받았겠지만 보다 우리 아버님의 피가 나한테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생활인으로서의 신동엽 시인은 어떤 분이셨나요?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말하자면 우선 충청도 양반이다 보니까 점잖고 말수가 적고 상당히 모범적인 사람이었죠. 대인관계가 굉장히 좋아서 친구도 많았고요. 그런데 가정적으로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편이었죠. 또 항상 몸이 약했어요. 그리고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항상 밖에 애인이 있는 사람 같았어요.

실제 애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그 사람 머릿속에는 가정을 잘 돌보고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 시에 제 남편을 뺏기고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 그 시대에 소위 문학이나 예술을 하시는 분들은 술, 담배를 많이 하셔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떠셨어요?

술은 아마 피할 수 없었을 거예요. 문단 생활을 하면 자연히 저녁 때 다들 술 같이 하니까요. 그런데 돈벌이가 별로니까 막걸리, 소주를 마시면서 더 건강을 해쳤다고 봐야겠죠. 담배도 많이 했고요.

▶ 인병선 선생님도 성격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참고 사셨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제가 결혼하고 처음 1년 정도는 부여 시댁에서 같이 살았는데요. 저희 시부모님은 저를 시집살이 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결혼하자마자 디스토마를 앓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부부가 같이 있지 않게 되고 격리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서울로 왔죠. 그러다가 1959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양반의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이 되고 병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 4.19를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죠.

▶ 두 분 다 문학적으로 훌륭하신데요. 그러면 세 분의 자제분들은 어떠실까 궁금합니다.

저는 예술이나 문학쪽은 되도록 접근을 안 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 어떻게 보면 나쁜 엄마였는데요.(웃음) 그래서 큰 아들은 의대를 갔고요. 작은 아들은 전자공학을 했어요. 그리고 큰 딸은 서울대 미대를 나왔죠. 미술을 안 하면 안 된다고 자꾸 고집을 피워서 미술을 하게 되었고 독일에 유학까지 다녀왔죠.

그런데 큰 아들이 의대 본과 2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되었어요. 그래서 병역을 마치고 나서 한 10년 성남에 가서 노동운동도 하다가 김영삼 정권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학생들은 복학시키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복학이 돼서 지금은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어요. 결국 자녀들이 다 문학쪽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 격동의 세월을 38년간 홀로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여자의 일생으로 보면 본인의 삶이 어떠셨던 것 같으세요?

제가 혼자 된 것이 서른다섯이었거든요. 제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이 인생을 70으로 봤을 때 절반은 내가 완전히 헛다리짚었다고 생각했죠. 제가 신동엽 시인한테 전부 다 걸었었잖아요. 정말 올인 했다가 꽝을 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뭔가 나를 위한 삶을 살고 내 일을 한다는 것을 최대 목표로 잡았습니다.

물론 아이들 키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요. 서울대 철학과에서도 저한테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제가 결국은 연애에 빠져서 이렇게 되었는데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어요. 그것이 혼자되고 나서는 그렇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경제적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3년 출판사도 다니고 여러 가지로 고생을 하다가 어머니의 유산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볏짚문화에 완전히 매달리게 된 거죠. 그런데 아이들과의 관계는 혼자서 한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 역할을 다 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 하거든요.

아버지가 있으면 저는 엄마 역할만 하면 되는데, 저는 엄하기도 하고 자상하기도 한 양쪽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거든요. 그리고 저는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비교적 아이들에게 냉정했어요. 그래서 경제적인 것은 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의 삶은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 라는 주의였죠.

▶ 신동엽 시인과 사신 것을 “꽝이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왜 그렇게 강하게 표현하신건가요?

그 분한테 올인했다가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잖아요. 정말 그 때의 심정이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그 당시에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막막했거든요. 그래서 심지어 제가 다시 태어나도 결혼은 안 한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죠.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저를 버티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러고 뭔가에 매달리려고 했다면 또 허탕 짚고, 허탕 짚는 것들이 반복이 되었겠죠.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앞으로 짚문화를 발전시키는 얘기는 한이 없습니다. 지금 많이 박물관을 통해서 활동 영역도 넓어졌고, 현대의 재활용되는 노력들을 사회적으로 실험하는 작업도 많이 해요. 이번 달 13일부터 장애인 대상 짚풀 체험학습을 한 결과물을 가지고 한 달 동안 전시를 해요.

저희가 스무 차례 정도 정신지체 장애인, 청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지푸라기를 가지고 가서 가르치고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도록도 내고 전시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작업치료학적인 실험도 하고요. 거기서도 전에 지푸라기 한 번 만져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볏짚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하는 것도 여러 가지 연구의 대상이 되고요.

우리가 매일 쌀밥을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의 역사가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이들도 이런 볏짚을 좋아하거든요.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건 뭔가 끌리는 것이 있는 거예요. 신비한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을 과학적인 데이터나 증거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저희가 생생하게 보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치매 노인 복지관에도 가서 활동하는데요. 이런 것들이 다 새로운 영역이죠.지금 무한히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실험을 거쳐서 짚문화가 과연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이런 것들이 참 재미있는 것들입니다.

▶ 짚과 풀과 인생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무한히 할 일이 많으실까요?

제가 선택한 길이고, 제 인생이 짚과 풀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나 노력을 빼놓으면 저는 없죠. 그것을 할 때만이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 즐겁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계시니까 선생님은 아주 행복한 선택 받으신 분이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 나이에 일없는 분들은 너무 빨리 늙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늙을 틈이 없다고 할까요? 그런 것은 있습니다.

▶ 그럼 ‘신동엽 시인 문학관’은 언제쯤 완공이 될까요?

부여군에서 지금 열심히들 하고 계십니다. 이왕 하려면 예술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고, 유물들을 보존하려면 여러 가지 시설들도 필요한데 빈약한 예산가지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수님 이하 여러분들이 열심히 하고 계세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