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신동엽, 그가 부른 4월의 노래 <KBS 월드라디오, 2005.04.20>
2005.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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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의 설레임과 변화에의 기대가 한껏 어우러져 해묵은 밭을 한바탕 갈아엎고 새로운 씨앗을 뿌려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4월이다.
일찍이 ‘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 노래하며 이 땅의 민중들이 폭정에 맞선 동학혁명과 불의의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을 사랑했던 민족 시인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으라고 노래하던 시인 신동엽은 그 누구보다 투철한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이 땅의 이름없이 살다간 민중의 삶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 등 민족사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민족 문학을 고집했던 것이 민족 시인 신동엽 이다.
문화관광부가 정한 올해 4월의 문화인물인 신동엽..
그를 기리고 또 그를 온전히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시인의 고향 부여로 모아졌다.
계백 장군 동상이 우뚝 서있는 부여 군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나라 현대 시 역사에서 단연 우뚝 솟은 봉우리의 하나인 시인 신동엽의 생가가 있다.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시인의 아내 인병선이 되사서 옛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원래 초가였던 지붕만 기와로 바뀌었을 뿐 두 칸, 부엌 한 칸의 전형적인 세칸 짜리 집에는 생전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육필 원고, 그리고 그가 쓰던 물건들의 일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한켠에 마련된 방명록에는 그를 기억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고백들이 생생히 담겨져 있는다.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자랑하던 그는 국비 지원학교인 전주 사범에 들어가면서부터 책에 탐독하게 되고 사회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신동엽의 시 정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서는 바로 역사 의식으로 시인의 아내 인병선의 말처럼 신동엽의 문학적인 저력은 금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백제의 고도’ 부여로부터 잉태되었다.
신동엽은 백제의 정신을 사랑했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는 본디 ‘새벽’이란 뜻을 가진 ‘소부리’ 혹은 ‘사비’로 불리는 땅이었다. 하지만 660년 당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되는 비운의 공간이기도 하다.
민중의 삶과 저항에 깊이 천착한 신동엽은 문학 평론가 김형수의 말에서처럼 특히 백제 미학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1967년에 발표한 장시 ‘금강’을 통해 진정한 참여 시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갑오농민 전쟁에 바치는 헌사 중 단연 으뜸으로 평가되는 이 시 ‘금강’에는 엄격한 신분 질서와 봉건적 토지 소유제를 고집해온 낡은 왕조를 향한 농민들의 분노가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실제 금강은 3천 궁녀가 몸을 던진 백마암등 백제 멸망의 분노를 숨결처럼 간직하고 있으며, 1894년 갑오년에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강물처럼, 지뢰처럼 터뜨렸고, 일제 때에는 이 땅의 착취가 자행된 현장으로서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곳이다.
그 강의 지척에서 이 땅의 수난사를 곱씹은 신동엽이 시 ‘금강’을 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 생활을 하게 된 이래 간암으로 그의 생이 마감된 1969년까지 시집 <아사녀>와 장시 <금강>,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등을 펴낸 신동엽은 그의 시력 1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우리 문학사에 매우 선명하고도 강렬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는 그 시들을 통해 왜곡된 민족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민족 공동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그가 지향하던 바의 실천적 결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백제교라 부르는 다리를 건너면 잔잔히 흐르는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호젓한 솔숲 언덕에 신동엽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있다.
그의 시 <산에 언덕에>가 세겨진 단출한 시비가 일찍이 시인이 작고한 후 1주기를 맞아 그의 유족과 친구들이 신동엽을 기리기 위해 마련하게 되다.
특히 생전의 만남을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절반의 생을 함께한 부인 인병선이다.
시인의 아내로 그 누구보다 시인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인병선은 시인과의 짧았던 인연을 길게 추억하고자 이 시 ‘신동엽 생가’를 쓰게 됐다고 한다. 이화여고 졸업반으로 명륜동 서점에서 신동엽을 처음 만나던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신 시인과의 첫만남을 소녀처럼 화사한 웃음으로 들려준 인병선.
신동엽 시인을 만나 그의 詩作 생활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그녀에게 1969년 간암으로 세상을 등지게 된 신동엽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홀로 남겨진 채 2남 1녀를 키워야 했던 인병선은 그와의 만남에서 이뤄진 소중한 인연으로 새로운 삶을 꾸려가게 된다.
부여에 와서 접한 농민들의 삶을 통해 기층 서민의 생활 토대인 짚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인병선은 이후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으로 더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부여라는 공간은 신동엽뿐 아니라 시인의 아내 인병선에게까지도 삶과 정신을 규정하는 곳으로 자리한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이곳에서 백제의 역사는 끝이 났지만 신동엽은 새로운 역사를 보았다.
그래서 옛부터 모든 것이 모여 썩고 망하는 곳이라 말한 금강에서.. 새로운 정신을 남긴 신동엽은 백제를 사랑하며 백제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했다.
금강의 물줄기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으라 하던 신동엽의 노래는 그래서 매년 갈아엎는 달 4월이 되면 온전한 자유를 갈구하는 이 땅의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더욱더 길고 진하게 되새김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