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오려내는 환상의 연속무늬 <오마이뉴스, 2005.07.21>
2005. 07. 22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종이를 오려 문양을 만드는 일상의 평범한 일이 아름다운 고유문화의 하나로 이 땅에 넓게 퍼져 있다가 불과 한 세대 만에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60년대까지도 '종이 오리기'(아직 공식 통용어는 아니다)가 일상생활에서 활용되었음은 취재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되었다.
▲ 설경 장소를 장식하던 문양의 하나로 한지를 접어 가위만 써서 오린 것. 무늬를 이루는 선은 2~3 mm 굵기. 경남 울주군 김장길의 작품. 40 X 58. ⓒ2005 곽교신
'종이 오리기'는 '설위설경(設位設經. 이하 '설경')'이라는 민간신앙과 의미상으로 혼동되며 학자들조차 '종이 오리기'와 '설경'을 무의식중에 혼용하여 쓰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단순히 장식 목적으로 쓰인 종이 오리기는 무속적 염원을 품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경을 곧 종이 오리기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종이 오리기에서 무속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 전통 문화로 접근하며 종이 오리기를 다룬 첫 번째 책이 이제야 출판을 목전에 둘 정도로 이 부분은 일반의 관심권 밖에 있었다. 이는 종이 오리기가 곧 설경과 무속 무구(巫具)로 인식되면서 접근을 꺼리던 통념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책으로 나올 내용들은 서너 달 전에 기자가 인병선(짚풀생활사박물관장)씨의 연구실에서 우연히 보았던 자료들로 당시 만해도 출판이 불확실하였다.
▲ 팔상문. 경북 울주군 김장길씨 1994년 작품. 40 X 56. ⓒ2005 곽교신
보충 취재를 위해 자료가 넘어간 현암사를 찾아갔다가 형난옥 전무에게서 매우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인병선씨가 수집한 자료 중에 가장 화려한 '팔상문'을 형 전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팔상문의 가치를 무시해서 가벼이 여긴 것이 아니라 팔상문 정도의 문양은 형 전무가 어렸을 때 사돈 등 귀한 손님이 집에 오시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쓱쓱 오려서 상 위에 깔았었다며 "이건 신기한 물건이 아니다"는 말투였다.
팔상문에 담긴 뜻과 문양의 정교함 여부를 떠나 '대수롭지 않게 보는' 그 사실이 기자에겐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팔상문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형 전무의 태도는 곧 종이 오리기가 불과 한 세대 전까지도 여염에서 널리 쓰이던 생활 장식의 한 부분이었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물론 종이를 접어 가위로 적당히 오려 문양을 내서 문에 창호지를 바를 때 적적한 공간을 메우거나, 유리창에 발라 차광 겸 장식을 했던 간단한 정도의 종이 오리기는 기자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팔상문 같은 복잡하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문양을 상위에 깔아 일회용으로 썼다는 형 전무의 말은 종이 오리기의 일상성을 증언하는 중요한 말인 것이다.
이는 종이 오리기의 연구 및 재현이 무속 행위의 부속물이라는 심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무속 장식물'이라는 딱지를 뗀 종이 오리기의 화려한 문양 세계를 현대 디자인의 소재로 널리 활용할 재인식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팔상문 정도의 세밀한 문양을 오려내려면 시간이 꽤 걸렸겠다는 질문에, 형 전무는 여자들이 부엌에서 상보로 삼을 겸 자주 오리며 손에 익은 일이어서 별로 어렵다는 생각 없이 오린 걸로 기억했다. 그 자신도 아직 몇 가지 문양은 능숙히 오릴 수 있으며 고향집(경남 거창)에서는 지금도 대접한다 싶은 상을 볼 때면 한지를 오려 쓰고 있다고 말했다.
형 전무의 증언을 토대로 종이 오리기 확산 과정을 추측한다면, 설경 장식에 쓰이던 종이오리기가 일반으로 흘러든 것이 아니라, 민간에 성행하던 종이오리기를 법사들이 설경 장소 장식을 위해 도입하여 세밀히 발전시킨 것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설위설경에 의해 오늘날까지 명맥이 유지된 종이 오리기
동남아에서 일본까지 아시아 전역에 전해오는 종이 오리기는 시작된 곳과 때를 정확히 모른다. 기예의 정교함은 중국이 단연 앞서 가나 그 맛이 우리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은 사찰 법회 때나 굿당의 장식에만 쓰이면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는 상태다.
▲ '치마거미사(紗)'란 이름의 문양. 거미의 발을 기본 문양으로 하고 있다. ⓒ2005 곽교신
무속으로서의 설경 행위와 설경 장소를 장식하기 위한 고유문화로서의 종이 오리기 행위는 구별되어야 옳다. 그러나 설경 장소 장식에 종이 오리기를 사용한 것이, 결과적으론 지금까지 설경이 종이 오리기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유지한 것이 되니, 사라질 뻔한 고유문화를 지켰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한편 종이 오리기를 설경에서 씀으로서 종이 오리기가 무구(巫具)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는 부정적인 면도 발생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화재(충남무형문화재 제24호 '태안설위설경')로 지정되어 있는 장세일(74·충남 태안) 설위설경 기능보유자는, 그 자신이 법사(法師)로 설경을 행술하면서도, 민속신앙으로서의 설경과 고유문화로서의 종이 오리기는 따로 구별되어야 옳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이런 조심스런 의견 제시는,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 말살이 목적이면서 겉으론 '미신 타파'란 명분 아래 일제에 의해 많은 귀중한 민속자료들이 사라졌고, 정부 수립 후에도 역시 '미신타파'란 명분으로 제대로 된 평가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진 많은 고유문화를 떠올리는 장 법사의 염려이리라. 장세일 법사의 이 고민은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가졌던 기자의 고민과 그 맥이 같다.
기독교 일부 교파에서는 이런 소재를 전통 문화란 이름으로 다루는 것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기자도 힘든 일을 기도에 의지하는 크리스트교 신자다. 불교 교리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문화로서의 불교 미술에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유적 답사에 참여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종이 오리기는 설경이라는 민속신앙에서 활발히 쓰였지만 그 자체는 귀중한 우리의 전통 문화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종이 오리기 기능의 유전자
종이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소재이다. 신문지나 잡지를 접어서 만든 딱지는 어렸을 적 좋은 장난감이었다. 주로 여자 아이들의 놀이였던 '종이 오리기'도 그 중의 하나다.
종이조차 귀했던 때의 여자 아이들은 풀각시를 만들어 놀았지만, 종이가 흔해진 세대는 종이를 오려 인형을 만들고 종이로 옷을 만들어 색을 칠해 인형에 갈아입히며 놀았다.
짚풀문화연구에 평생을 바친 민속학자 인병선씨를 인터뷰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한 두툼한 종이 오리기 자료 파일을 본 후.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학문적 자료로서의 종이 오리기에 대한 참고 자료가 거의 없음에 놀라야했다
일본은 1900년대 초부터 종이접기를 야심찬 문교 정책으로 펼쳐 드디어 전 세계에 그들의 종이접기를 퍼뜨렸다. 종이접기 침투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데,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종이접기가 일본의 문화인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종이접기 단체는 종이접기의 근원은 밝히지 않고 종이접기와 전통 종이공예를 혼합하여 우리 것과 일본 것을 혼동하게도 한다.
일본의 것이니 무조건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본 문화인 종이접기가 우리 초등학교까지 파고 든 반면, 우리의 화려한 종이 오리기는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차에 현암사 형난옥 전무의 팔상문에 대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은 기자에게 "그럼 어디, 나도 한 번 오려봐?"하는 용기를 주었다.
▲ 기자가 실습에 참고한 사진 ⓒ2005 곽교신
형 전무의 말에 몸 안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종이 오리기 전통의 혼을 확인할 겸 한지와 가위만을 들고 생애 처음의 종이오리기에 도전했다.
기자는 종이오리기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으나 어떤 실기 교육도 받은 일이 없다. 그냥 얇고 질긴 한지와 잘 드는 가위가 도구의 전부라는 지식 밖에 없고, 실습의 참고 자료는 위에 제시한 사진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오렸을 뿐이다. 접은 한지에 밑그림도 그리지 않았으며 도구는 문방구에서 파는 천 원짜리 공작가위가 전부였다.
처음에 오린 종이는 너무 작게 접어 무늬를 오려내기 힘들었다. 두 번째 시도로 한지를 36Cm 정방형으로 잘라 접어 오린 후 종이를 펼치고는 그 결과에 스스로 놀랐다.
ⓒ2005 곽교신
ⓒ2005 곽교신
ⓒ2005 곽교신
ⓒ2005 곽교신
<오린 종이를 차례로 펼친 모습. 펼치면서 나타나는 화려한 문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시도로 얻어낸 작품. 완전히 펼친 것이 36 X 36>
주변에선 '생전 처음 오렸다'는 말에 놀라워 했다. '생전 처음'이란 말에 용기를 얻은 한 여기자는 '그럼 어디 나도 한 번 오려볼까'하면서 오려냈는데 역시 훌륭한 문양으로 나왔다.
이는 외국인은 따라 하기 어려워하는 "대~~한!민!국!"의 엇박자 응원박수를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특별한 연습 없이 잘 따라하듯, 종이 오리기의 재주가 우리 안에 유전인자처럼 잠재해 있는 문화형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했다.
적당한 공식 용어조차 없던 종이 오리기가 민속학자 인병선의 관심에 의해 관람의 대상이 아닌 실기의 대상으로 세상으로 다시 나간다. 그 책에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종이 오리기가 아니라 흥미로운 일상 공예로서의 종이 오리기가 접고 오리는 방법과 함께 실린다 하니, 종이 오리기가 고유문화로서의 관심을 얻어 전통 문화의 한 갈래로서 새로운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
기자가 오렸다면 독자 여러분도 오려낼 수 있다. 사진을 보며 모방하고 오려 용기를 얻은 후, 나만의 문양을 하나씩 오려보자. 전통이나 문화는 결코 우리 일상과 먼 고고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