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풀문화야 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현대불교, 2005.4.1>

200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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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엄자리에 던져두면 썩은 거름이 되고, 아궁이에 넣으면 연료가 돼 방구들을 덥혀주며, 물 가득한 가마솥에 넣어 끓이면 소여물이 된다. 이뿐이랴, 지붕으로 얹으면 초가집이 되고, 새끼를 꼬아 틀고, 매듭을 묶으면 짚신이 된다.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된 짚과 풀은 우리 전통적 삶의 양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된 재료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흔했던 탓일까. 아니면 서민의 문화였던 탓일까. 홀대를 받으며 우리 짚풀문화는 양철지붕과 슬레트, 플라스틱제 공산품에 밀려 급격히 사라져갔다.

이처럼 쇠멸해가는 문화의 한 자락을 붙잡고, 짚풀문화를 전통문화의 정수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이가 있으니,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70)이 그다. ‘껍데기는 가라’ ‘금강’ 등의 걸출한 시로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민중 시인으로 추앙받는 신동엽 시인의 아내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인 관장은 1970년대 후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짚풀문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연구·수집하기 시작, 25년 동안 5000여 점의 공예품을 수집하고 200여 가지 공예기술도 습득해 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짚풀생활사박물관을 개관했다. 2001년 명륜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박물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짚풀문화야말로 전통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지요. 삶의 한 부분으로서 형성된, 생산·기층문화로서의 짚풀문화에는 자유분방한 다양성과 생명력이 있어요. 보여주기 위한 문화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힘이 넘칩니다.”

세계 유일의 짚풀 전문 박물관인 짚풀생활사박물관은 전시와 수장 이외에도 다양한 짚풀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마련해 어린이에게는 체험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짚풀공예전문가도 배출하고 있다.

인 관장이 짚풀문화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무렵. 전통 문화를 찾아 전국 각지를 답사하던 그는 우연히 단양 베틀재 마을에 머물게 됐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노란 새 짚으로 지붕을 얹어놓았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모습이 갓 단장한 새색시 같더라고요. 솜씨 있게 꼬고 틀어 올리고 매듭지어 집안 여기 저기 걸어놓은 주저리, 등주리, 잠박 등 짚풀 민구(民具)까지 한데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요. 그때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 못하죠.”

이 일을 계기로 인 관장은 짚풀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대로 사라지게 방치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마저 생겨났다. 이후 그는 전국 농촌을 돌며 짚풀 민구와 기능 보유자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막상 농촌의 생활용품을 수집하려하니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생활용품은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던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빛이 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으로 된 민구가 사라져가는 현실 앞에서 그런 거리낌은 덮어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짚을 민중과 함께 희로애락·생로병사를 나눈 친구요, 안식처라고 말한다.

“짚이 워낙 삶과 밀착된 재료다 보니, 사람이 나고 죽을 때까지 잠시라도 짚과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요. 삼신짚이라 해서 산모의 산욕(産褥)으로 짚을 깔아주었지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집 문에 걸어둔 금줄도 짚으로 만든 것이었고요. 또 일생을 짚으로 만든 초가집에서 보냈지요. 죽음과도 무관치 않아, 초분(草墳)이라 해서 짚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지요.”

한창 짚풀문화의 매력에 빠져있던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찾아왔다. 1982년경 서울의대 재학 중이던 큰 아들이 학생운동을 이유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에 끌려간 것. 군대 내 의문사가 잦던 시절이라 인 관장은 불안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촛불을 밝혀 허공에 대고 무작정 기도했다. 이를 안 친구 하나가 그를 불교로 인도했다.

친구의 손에 끌려 찾아간 곳은 서울 보광사. 친구가 시키는 대로 법당에 들어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오만함과 과오를 깨닫고, 참회하고 또 참회했다. 참회를 통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인 관장은 정일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육조단경> <선가귀감> 등 선어록을 읽었고, 매주 토요일에는 참선정진에도 참여했다.

“<반야심경>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의미가 도무지 풀리지 않던 때였어요. 정일 스님이 법문하길, 똥을 놓고 사람들은 더럽다 하지만 구더기에게는 더할 수 없는 먹거리요 안식처라는 것이에요. 이거다 싶었지요. 앉은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삼배를 올리고 말았어요. 남들은 더럽다 꺼리는 닭똥·쇠똥 묻은 민구를 저는 보배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바로 제 얘기 같더군요.”

상대(相對)적 견해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은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하던 마음에 물을 끼얹은 듯한 고요함을 가져다주었고, 부처님의 안심법문은 민중의 삶에 안식처가 돼준 짚풀의 포근함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만난 불교는 그로 하여금 온갖 갈등을 접고 짚풀문화 지킴이로서의 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중심을 지탱하는 힘이 돼 주었다.

박물관장으로서 그의 최우선 과제는 박물관 운영상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일이다. 박물관을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입장료 수입만으로는 엄청난 적자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비를 털어 적자를 보존하고 있지만, 후대에도 이 박물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다. 사립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 다루지 못하는 분야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의 원천이 되며, 사회적 환원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공립박물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인 관장의 바람은 짚풀공예가 교과 과정에 편입되도록 하는 것. 일본에서 온 종이접기는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지만, 정작 우리 짚풀공예는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짚풀문화의 원초적인 생명력은 예전 같지 못하지만, 전통 공예로서의 가치는 남아 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짚풀문화 및 공예를 다시 평가하고 재정립할 때입니다. 교육과정 반영을 통해 짚풀공예 저변을 확대하고, 현대화를 모색해야합니다.”

그의 손끝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짚풀 문화, 21세기에 어떠한 모습으로 또다른 생명력을 획득할지 지켜볼 일이다.

(박익순 ufo@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