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초가, 멍석 등 독특한 풀문화에 매료됐죠" -2008.10.9 제민일보

2008.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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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초가, 멍석 등 독특한 풀문화에 매료됐죠"
[허영선이 만난 사람] 짚풀생활사박물관장 인병선

   
 
 

 짚풀문화연구가 인병선은

 1935년 평남 용강출생. 이화여고,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다. 1993년 직접 설립한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 역임. 1991년 '짚풀문화특별전'(국립민속박물관), 1994년 '100주년 기념 동학농민 전쟁 민속전', '맥간공예-보리짚·밀짚 특별전' 등 각종 전통 공예 전시회를 수없이 열었다. 1978년부터 전국 답사하며 짚풀 문화를 조사, 채록했고 오키나와 국립민족학박물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시집 「들풀이 되어라」(1988), 산문집 「벼랑끝에 하늘」(1990), 「짚문화」(1989), 「풀문화」(199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1995), 「풀코스 짚문화 여행」(2000),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종이오리기」(2005), 「시인 신동엽」(2005) 등. 2005년 제2회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수상했다.

 
 
  '껍데기는 가라'. 이 한올의 시가 이 땅의 청년들, 누군가의 가슴에 불꽃을 지피고 떠난 뒤였다. 그 사랑과 혁명의 시인, 신동엽이 서른여섯 생애를 다한 후였다. 그녀가 지푸라기라도 잡듯 이 땅의 하릴없는 짚풀을 잡고, 거기에 매달려 남은 생을 다 바치게 된 것은. 그 시인의 그늘아래 있던 아내 인병선. 그녀는 전국의 시골을 땅거미 훑듯 배낭하나 메고 누볐고, 문을 두드렸다. 헐거운 농촌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났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도 그런 모습으로 제주도를 찾았을 때였다. 1990년대 초반, 오십대였다. 늦은 시작이라 생각했다. 허나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던 그녀는 서울 한복판에서 짚풀생활사박물관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사춘기 소녀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냈던 인병선 관장. 그 박물관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제 홀가분해졌어요. 짐을 다 부려놨어요." 그녀의 첫마디였다. 사립박물관인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이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내놓았다는 얘기였다. 뜻밖이었다. 국가나 개인이 아닌 개인이 법인을 설립,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사례가 아닌가.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한옥 마루, 젊은이들 몇몇이 둘러앉아 짚으로 뭔가를 엮고 있었다. 멋드러진 전통한옥의 마당은 흙냄새가 폴폴 났다. 서울의 한복판에 흡사 시골 농가의 어느 집을 옮겨놓은듯한 박물관이라니. 현대식으로 이뤄진 그 내부엔 짚이나 풀로 만든 옛 장인들의 솜씨들이 전시돼있다. 제주도의 망태기도 보이고, 멍석, 짚신, 삼태기, 도롱이…. 눈에 익은 정든 옛 것들의 공간이다. 세계 속에도 찾아볼 수 없는 짚풀생활사박물관. '지푸라기 할머니' 인병선 관장. 그녀가 볏짚으로 만든 앙증맞은 용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아이들이 볏짚으로 달걀 꾸러미 만드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이 박물관은 남녀노소의 체험공간이다. 아이들의 문화체험장으로, 장애인대상 짚풀체험학습장으로, 마을 노인들의 짚풀체험장으로 하루도 쉴 날이 없다. 제기차기, 땅따먹기 놀이도 이뤄지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 제주도, 띠 이용한 초가지붕이 관심의 초점

"제주도의 특징은 남방식물들이죠. 육지쪽에선 볏짚으로 하는데 볏짚이 별로 생산되지 않는 제주에선 뭘 어떻게 하는지가 관심의 초점이었죠. 제일 중요한 게 초가지붕이죠. 육지쪽에서도 띠풀같은 것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제주도는 거의 볏짚이 아니고 새(띠), 어욱(억새)을 이용한 것들이예요." 그녀의 제주답사 시절의 기억부터 불러냈다. 그때 본 제주의 짚풀문화. 사료자체도 볏짚을 육지에서 쓰지만 제주에선 거의 새로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재밌었고 중요했다. 육지 짚문화를 제주도에서는 풀문화로 대신했다는 것이 독특했다. 삼태기 같은 것도 거의 다 풀로 했다니 그 창의력에 혀를 내둘렀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시 어느 농가에서 본 식물 신서란. 제주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은 것이라 했다. 그 신서란, 삶아보니 완전히 내부가 섬유덩어리였다는 것에 또 놀랐다. 그것으로 엮은 제주도 멍석의 멋에 또 탄복. 오래전, 제주답사길. 그녀는 중산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홀로 만나고 사진찍고, 자료 채취를 하면서 그렇게 제주도에 매혹됐다. "제주도 멍석은 굉장히 고와요. 촘촘하고 성실하죠." 이후, 제주도를 수십차례 드나들었다. 제주도 농촌 사진도 수없이 찍었다. 널려진게 풀문화 자료였다. 얼마없어 사라져 버릴 것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수집했다.

인터뷰하면 농민들은 서로 말도 안통해도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허나 25년이 지난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팔라졌다.

"답사할 대상이 전혀 없어요. 현장이 다 없어졌어요. 그렇게 제주도만큼 빨리 변하는 데가 없어요. 왜 그렇게 깨서 직선도로를 많이 내요? 제주도가 산업도시도 아니잖아요. 직선도로의 고속화라는 것은 산업화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렇게 빨리 할 것도 없는 지역이 그런다는게 이해가 안가요. 제주도의 꼬불꼬불한 길 자체가 매력적이잖아요"

# 우장·구덕 장인 도차원 무형문화재 지정해야

그녀는 이렇게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안쓰러워 한시라도 빨리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장이나 구덕은 여러 종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지정해야 한다고 봐요. 좀 있으면 어려워지잖아요. 물구덕이니 뭐니 이게 바구니 종류가 비슷해보이지만 굉장히 형태가 달라요. 대나무도 시누대를 쓰거든요. 담양제품은 왕대를 쓴다거나 이런 거지만 그쪽은 가는 시누대를 갖고 엮는데 형태가 독특해요. 그런데 행정적으로 뒷받침이 안되는 것이 이상해요."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던 그녀는 제주도의 무형문화재 정책이 아주 빈약하다고 본다. 문화재청 지정 말고라도 도 차원에서라도 더 확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않던 짚풀에서 진짜 예술을, 농민의 예술을 보았던 인병선. 그것들을 문화로 끌어올리고 사라져가는 우리 이름들을 불러낸 인병선. 그녀는 단호했다. "제주도가 사는 길은 제주 고유의 가치를 살리는 것입니다."

# 사춘기 시절보낸 피난지 제주도는 고향같은 곳

그녀가 제주를 이렇게 붙잡아두고 싶은 이유가 있다. 제주도는 그녀에게 제2의 고향. 1·4후퇴 직전 왔던 피난지였다. 오빠는 의용군으로, 유명한 농업경제학자였던 아버지 인정식은 북으로 납치된 후였다. 중2년생이었던 그녀는 어머니와 단 둘만 피난대열에 섞여 제주도로 흘러왔다. "부두에 무청이 시퍼런게 잔뜩 쌓여있는게 신기했죠." 그 상큼했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제주시 기상대 바로 아랫집에 세들었다. 오현중 마당 천막학교에서 돌멩이 깔고 앉아서 공부했다. 여름엔 느티나무 매미소리 들으며. 중3에서 고2까지.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누런 광목을 사다가 표백제를 사다 표백하고 적삼을 만들어서 시장에 나갔다. 와중에 재봉틀 하나 안고 온 어머니였다. "뭐 두세시간에 다 팔리는 거예요. 싸면서도 신기하거든. 완전히 기성품이니까 불티났어요." 어머니 잠깐 부산 다니러 간 새 그녀는 시장에 나갔다가 군용담요를 사고와서 멜빵 바지들을 만들었다. 시장에 나가니 그것 또한 불티났다. 나중에 어머니가 알고 하도 어이없었던 예화가 기억난다.

학교에서는 '빨갱이 딸'이라고 따돌림 당했다, 문학을 꿈꾸며 바닷가에 나가 늘 혼자 놀았다. 흡수력 강하던 시절, 공부에 몰입하기엔 좋았다. 고1때, 교수가 중앙대학 신학대학 청강을 권해 저녁마다 거기가서 히브리어 배우고 종교사도 배웠다. 서울대 철학과는 그 영향으로 들어간 셈이다.

   
 
   
 
# 남편 신동엽, 아버지 인정식이 정신 거름

운명은 순간이다. 고교 졸업반, 헌책방에서 철학 관련 책을 찾을 때였다. "그 책은 없습니까?" "그 책은 없지만 이 책은 어때요?" 하는 소리에 돌아봤다. 그때 헌책방 지키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처럼 크고 빛나는 눈은 처음이었고, 동시에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양반 만나면서 이렇게 된거예요." 그녀가 올인하던 그 민족시인 신동엽이 아파서 일찍 세상을 떴을 때, 그녀 나이 서른다섯. 올망졸망 세아이를 거느려야 했다.

"남편 가고, 처음 2, 3년은 문학으로 승부를 걸어보려고 응모도 하고 그랬지요. 애들과 살아보려고 하다보니 안됐어요." 그래도 그것을 써야 소화가 될 것 같았다. 4·3의 막바지였으나 산쪽 불길이 선연하던 제주의 체험, 그것이 꽉 눌려있었다. 그렇게해서 쓴 작품이 그녀의 단편 '고사리불'. 그리고 그는 발길을 돌렸다. 만학도처럼 늦은 길이었다. 허나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그를 가슴 뛰게 만들었다.

"신동엽이라든가 아버지의 정신이 거름처럼 깔려 있었으니까. 남들은 값나가는 것, 서각 도자기가 관심이었는데, 나는 태생적으로 지배권 문화에 관심이 없고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것은 내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환경이 준 거 아니겠어요?" 농민들, 생산자들의 문화인 땅은 권력자들이 다 가졌고, 일년 내 뼈빠지게 일하고서도 농민들은 50∼60% 알곡은 다 뺏기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마당에 수북한 볏짚을 생명처럼 지키던 사람들, 그 이듬해 농사를 위해서 뭘 만들던 눈물겨운 사람들. 그들의 분신같은 그것들이 급속하게 사라진다는 것. 이런 것이 그를 사로 잡았다. 그동안 일본 중국 등 동남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짚풀문화가 가능한 곳이라면 다 찾아다녔다.

일흔 넘은 지금도 들풀처럼 살고 싶어하는 여인. 짚풀과 열애하는 이 짚풀문화연구가는 지금도 짚풀에서 무한한 아이디어를 뽑아낸다. 그 저력의 우물은 어디일까. 그의 판단력과 용감한 성격이 아이들과 자아를 둘 다 실현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문화재전문위원 8년동안 그는 짚문화 인간문화재를 반대한 사람이다. 왜냐? "짚문화는 특히 자연이 줬던게 아닌가. 농민이 다 하고 누구나 다 장인이라는 거지요. 대중속에 돌아와서 대중속에서 재창조되고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예요."

지금, 당신의 마음이 흔들리는가? 이 시는 어떤지? 「어젯밤/길 없어 못 왔단/소식 들었습니다//길 없다 말고/마음 없다 하소서//마음 가는 데/길 안 가는 거 보셨습니까//길 없다 말고/차라리/그리움 없다 하소서」(인병선 '길')그렇게 그는 그의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그냥 산골골 숲골골 들풀처럼 흔들리면서.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