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주유소`에 기름이 바닥났다 <2005. 6. 9>

2005.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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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한국박물관협회 주최로 '사립박물관·미술관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과 정부의 역할'이란 주제의 정책세미나가 열렸다.

전국의 사립박물관 및 사립미술관의 관장과 학예사들이 상당수 모인 가운데 열린 이 자리는 세미나란 이름을 빌리긴 했으나 사실상 정부의 문화정책 우선 순위에서 방치되고 있는 사립박물관·미술관장들의 대정부 성토장이나 다름없었다.

정책당국의 방치와 사회문화적 중요도 인식의 마비로 운영의 현실적 핵심 문제라 할 박물관·미술관의 재정이 근본부터 위협받아, 결국 국민이 직접 접촉하는 현장 문화의 중요한 축인 사립박물관·미술관의 상당수가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국가든 박물관과 미술관의 양적 질적 수준은 그 나라 문화의 현재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그러나 이날 발표된 최병식(경희대) 교수의 발제 논문은 우리 나라 문화 정책의 현주소가 어딘지 의아하게 만들었다.

최 교수는 2004년 10월부터 2005년 3월까지 전국의 사립박물관·미술관 중에서 기업과 연계된 곳을 뺀 120여개 관을 직접 조사한 생생한 실태조사 보고서를 꾸며 세미나 주제와 같은 제목으로 약 40분에 걸쳐서 발제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21세기의 강력한 문화인프라 구축을 꾸준히 표방하는 정부의 문화정책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최 교수의 발표는 실태 조사를 당한 당사자이자 세미나 참석자인 사립박물관·미술관 관장들조차 그 암담한 실태에 발표장 곳곳에서 부끄러운 자괴의 한숨을 내뱉게하는 <사립박물관·미술관 부검 조사보고서>와 다름없었다.

▲ 이날의 단상 토론자들. 좌로부터 이인범(한국종합예술학교 수석연구원), 이종선(경기박물관장, 토론 좌장), 인병선(사립박물관회장, 짚풀생활사박물관장), 배기동(대학박물관협회장.한양대), 황평우(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위원장). 기자의 귀엔 처절하게만 들린 이들의 말은 고심 끝에 극히 일부 외엔 기사로 싣지 않았다.
ⓒ2005 곽교신

온통 부끄러운 통계 덩어리인 사립박물관·미술관 실태

우리나라의 사립박물관·미술관은 198개관으로(2005년 5월 현재) 국공사립 및 대학 박물관을 다 합한 등록관 수의 49.5%다. 이 절대 숫자는 문화선진국과는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어서 열거가 창피한 지경이다.

창피함의 상징적인 예로, 이 땅의 대표적 큰 도시들인 부산(한광미술관), 대구(송광매기념관), 대전(동산도기박물관), 청주(신미술관)에 각 1개이며 울산, 전주, 제주, 춘천, 창원에는 아예 단 한 곳도 없다. 심지어 예향(藝鄕)을 꼽으라면 당연히 떠오르는 전남 광주에도 단 두 곳 뿐이라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박물관·미술관에서 소장품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나, 설립 당시의 재정이 바닥나 가치있는 소장품을 더 이상 구입할 여력이 없다고 밝힌 곳이 80% 이상이라는 것은 너나 나나 살기 어려운 시절이니 그렇다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도록'을 단 한 번도 발행해보지 못한 곳이 과반수라는 것은 도무지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또 오늘날의 사회 생활에선 초등학생조차 필수 의사 전달 수단이 된 '이메일'이 상당수 박물관·미술관에 개통이 안되어 있다는 대목에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야말로 박물관 자신이 박물관인 셈이다.

학예사 문제는 이미 문제 제기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중병에 걸린 상태다. 학예사는 박물관·미술관 존재 이유의 핵심이다. 박물관·미술관의 학예사는 대학으로 치면 교수진이다. 운영의 핵심인 학예사가 아예 한 명도 없는 사립박물관·미술관이 상당수라는 것은 교수가 한 명도 없는 사립 대학을 연상하게 하며 머리를 혼란하게 만든다.

그나마 두고 있는 학예사의 월급여로 0(무보수 자원봉사) ~ 50만원을 지급한다는 곳이 18%(설문에 응답한 64개관 기준)라는 사실은 더 이상 실태 조사 보고서를 뒤적이고 싶지 않게 만든다.

마치 고의로 나쁜 점만 골라서 보고하려고 만든 악의성 문서로만 보이는 이런 문서는 '실태조사보고서'가 아니다. 분명 <사립박물관·미술관 부검 조사보고서>다.

최 교수는 전국 곳곳에 산재하며 문화전달자 및 사회교육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립박물관·미술관을 '문화 주유소'라 표현했다. 이 나라에 문화는 계속 돌아가는데 주유소가 절대 부족한 셈이다. 그마나 적은 수의 주유소마다 기름은 떨어져 간다.

하루가 시급한 학예사 제도의 방치를 보며

응답자 평균으로 보면 월급여로 백여만원을 받지만, 18%라는 많은 인원이 50만원 이하를 받는 학예사들은 거의 대부분 고학력자들로 석박사가 53%를 차지한다. 개개인의 처지에 의해 서류상의 학력은 갖추지 못한 경우라도 그들은 관련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문화적 소양은 사회적 정점에 올라 있으며 문화 리더로서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요즘 어떤 개그 프로그램에서 비롯된 "그까이꺼~"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50만원은 막노동으로 근근히 사는 서민들에게도 월급여로 내밀면 "그까이꺼!"일 것이다. 사립박물관·미술관에서 상당수의 학예사 또는 큐레이터로 불리는 고급 인력이 받는 급여로 "그까이꺼"를 대우한다면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존심 문제다.

많은 이들이 박물관·미술관 운영자들을 "돈 복에 겨워 고고하고 고급스런 문화인 행세나 하고 싶어"(이종선 경기박물관장)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또 박물관·미술관은 엄연히 사유 재산인데 운영이 어렵던 문을 닫던 그 소장품은 개인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평소에 박물관을 잘 찾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거나, 박물관·미술관의 설립동기, 운영실태 등 박물관·미술관 운영 내면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소장품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이런 "개인 소유의 개념"은 문화 선진국에선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다. 박물관·미술관을 설립하는 사람은 소장품을 사유의 개념이 아닌 공유의 개념으로 내놓은 사람들이다. 사욕을 취한다면 소장품을 처분하는 쪽이 훨씬 낫지 머리 아파하며 박물관을 운영할 이유가 없다.

물론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빙자로 갈취하는 사람도 있는 판이니 모든 박물관·미술관을 선의의 문화전도사로 볼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구성원의 감시력으로 지켜야 할 일이다. 구더기가 피더라도 장은 담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립박물관·미술관은 설립 초기의 씩씩한 모습은 사라지고 운영 재정의 고갈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들이 정부에 지원을 요구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대책없이 무너져가는 학예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학예사 급여의 최소한을 정부에서 보조해 달라는 것이다. 그 요구는 이 나라 문화 창달의 한 축이 분명한 학예사들의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최소한으로 보조한다는 측면에서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립박물관회 회장이며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열고 있는 인병선 관장이 절친한 친구로부터 정중하게 충고 받았다는 "너 왜 이거(박물관)를 하나? 이거를 꼭 계속 해야하니?" 라는 말은 오늘날 사립박물관·미술관의 총체적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함축적인 말이다.

발제 토론자로 나섰던 인 관장의 이 말을 듣던 한 참석자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기업과 계열을 이룬 박물관·미술관을 빼면 꼼꼼히 세어도 다섯 손가락을 못 채울 극히 일부의 사립박물관·미술관 관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장들은 가난하다. 그들은 세간의 인식처럼 부자가 아니다. 혹시 시작할 땐 부자 축에 들었더라도 꿈에 부풀어 시작한 박물관·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나락에 빠진 이들이 많다.

다달이 날라오는 전기세, 전화세, 수도세, 보험료에 한숨을 쉬는 평범한 국민들이요 우리 이웃일 뿐이다. 소득으로 보이는 입장료는 운영비의 10%를 채우기 바쁘다. 나름의 원대한 포부를 갖고 지식의 사회환원이라는 꿈에 부풀어 사립박물관·미술관을 시작한 그들은 결국 자기 재산의 마지막까지 다 팔아먹고 더 처분할 것이 없을 때 문을 닫아야한다.

그 땐 대부분의 소장품들이 '투자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그 때부터는 진짜로 '사유 재산'이 되며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사립박물관·미술관은 사회의 공유재산이다

세미나 끝에 사립박물관·미술관 관장들은 대정부 건의문을 낭독했다. 이종선 경기도박물관장이 읽은 건의문은 기자의 예상보다 정중한 문구로 표현을 자제하고 있었다.

사립박물관·미술관의 지원을 권고 사항에서 필수사항으로 법안 개정, 학예사 인건비 지원에 필요한 연간 30억의 학술자금 지원 요구, 사립박물관·미술관의 교육 기능을 법안에 명시 등 주요 사항이 사립박물관·미술관의 공적기능 강화에 맞춰져 있어, 강력한 시위성 문구를 생각하고 간 기자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이런 수준의 요구에 "대정부 건의문"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여야했다는 것은, 그동안 사립박물관·미술관과 정부의 의사소통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사립박물관·미술관과 그 소장품들은 법적으론 사유 재산이지만 지적으론 사유재산이 아니다. 관장들이 사회를 대신해 관리를 대신할 뿐이다. 물적 사유재산이지만 지적 공유재산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사립박물관·미술관이고 소장품들이며 사회 공동 소유의 문화유산이다.

무너져가는 사립박물관·미술관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정부가 최소한의 지원을 할 마땅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문화적 소양과 경제적 능력이 충분히 있다.

200여 사립박물관·미술관이 학예사들의 인건비 보조로 요구한 연간 지원금액 30억원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에서 1,2차 공적 자금의 이름으로 퍼넣은 국민 혈세 104조원의 약 3만4700분의 일이다.

온 국민이 분노했던 공적자금 1/3만4700을 일년간 지원해주면 우리 국민들은 일년 동안 휴일 하루 박물관에서 가족과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온종일이라도 고급 문화를 즐기며 학예사들의 고급 지식을 나눠가질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사립박물관·미술관 관장들만의 일인가.



<출처: 오마이 뉴스>